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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사회+

부마항쟁 계엄령 선포일.. 그리고 12.3 내란

by Insight LooM 2024.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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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당시의 계엄령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부마항쟁(釜馬抗爭)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현재 창원)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항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도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시위를 강압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확대했습니다.

계엄령의 주요 내용

계엄령 선포

  • 부마항쟁이 시작된 직후, 정부는 10월 18일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이어서 10월 20일 전국으로 계엄령을 확대했습니다.

탄압과 군 동원

  • 계엄령 하에서는 군대가 치안 업무를 담당하며, 시위 진압에 직접 투입되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경찰뿐만 아니라 군 병력까지 동원하여 폭력적인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언론 통제 및 집회 금지

  • 계엄령에 따라 언론은 철저히 검열되었으며, 모든 형태의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부마항쟁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연대를 차단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검거 및 구금

  • 계엄 하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체포되고 구금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문과 가혹한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한 주요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이 항쟁 이후 정권 내부에서는 긴장과 혼란이 심화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10월 26일에 암살되면서 유신 체제는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부마항쟁과 당시 계엄령의 발동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전개된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계엄령 선포 그날  79년 10월7일.... 그리고 24년 12월3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  P149 ~ P150

 

10월 17일 22시 30분 총무처에는 국무회의를 소집하라는 긴급한 지시가 청와대로부터 전달되었다.

이로 부터 1시간 뒤인 23시 30분 중앙청에서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소집된 임시국무회의는 개최된 지 10분 만에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을 결의했다.

 

10분 뒤인 23시 40분 김성진 문공부장관은 중앙청 기자실 에서, 18일 0시를 기해 부산시 일원에 계엄령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런 과정으로 볼 때 계엄령은 국무회의 절차를 통해 의결 공표되었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을 국무회의가 추인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실제로 비상계엄은 21시 15분 청와대 간담회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임시국무회의가 열리기 2시간 전에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간담회가 열렸다. 청와대 ‘서재회의’로 불린 이 간담회 자리에는 비서실장, 경호실장, 내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국방부장관, 의전실장, 공보실장, 문공부장관, 각 군 총장 등이 참석했다. 각 군의 총장이 참석한 데서, 부산지역 계엄선포를 위한 회의라는 것이 드러난다.이 회의 에서 ‘부산지구 비상계엄 선포’가 결정되었다.

 

10월 17일 21시 30분경 군수사령관 박찬긍 중장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으로부터 접수받은 명령은 바로 이 청와대 ‘서재회의’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부산지구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수사령관을 계엄사령 관으로 임명하며, 계엄 업무 수행을 위하여 정부 및 육군 관계관을 자문요원으로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재회의’가 시작된 지 불과 15분 만에 계엄사령관의 내정 사실을 통고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서재회의’ 이전에 계엄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서재회의’가 열리고 있을 시각, 부산에서는 위수령 발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위수령 은 10월 18일 이른 아침에 발동할 예정이었고, 이에 앞선 17일 22시 30분부터 위수사령관의 담화문을 가 두 방송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두방송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사항도 수립되었다. 하지만 청 와대 ‘서재회의’에서 계엄선포가 결정되었고, 부산에서도 그에 따른 준비가 진행되었다. 박찬긍 중장은 22시 30분 군수사령부에 계엄사령부 설치를 명령하고, 시위 예방을 위하여 출동한 2관구 병력을 인수했다.

 

23시에는 육군본부로부터 제1해병사단의 잠정편성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의 계엄사 배 속을 구두로 통보받았다. 23시 55분 계엄 집행 준비를 위하여 부산시장, 2관구사령관, 해역사령관 등 부산 지구의 중요 기관장을 소집하여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했다. 

이로써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하여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는 1972년 10월 17일 유신선포 이후 7년 만의 비상계엄령 발동이었고, 반정부 시위로 인해 계엄이 선포된 것은 1964년 6월 3일 한일협정 반대투쟁으로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래 15년 만의 일이었다.

 

 

부마민주항쟁당시의 계엄령 선포과정과, 이번 윤석열의 계엄선포과정이 놀랍게도 일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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